2023년 2월 19일 이동순 권사님(당시 98세)을 심방하며 대화한 내용을 요약합니다 : “그때가 일정시대 때인데 9살 먹고 학교에 가가지고 그래가 그럭저럭 지내다가 14살에 우연히 학교가 가기 싫었어. 여자를 학교에 보낸 경우가 우리 동네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머시마들이 맨날 가면 자꾸 여자라고 놀리고 그랬어. 그래서 내가 죽어도 학교를 못 가겠다 싶어서 엄마가 밥을 싸주마 그걸 가지고, 우리 집은 새 집을 지어가 도로가에 서 있고 앞에 동네 오두막집에 아줌마가 시집을 와 가 있는데, 거기 가서 내 밥을 다 까먹고 그랬지. 이제 학교 갔다 왔다 카고 한 며칠 동안 안 가니, 머시마들한테 학교 선생이 “(동순이가) 와 학교를 안 오노 가보라.”카니, 엄마는 밥을 싸주고 아가 학교를 갔다고 했는데, 안 왔다고 하니, (나중에는) 동생을 엎고 나를 데리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그러셨어. 하지만 그래도 가기가 싫어 가지고 내가 학교를 가기 싫어가 어디까지 가봤나 하면 평양까지 가봤어. 평양까지 가보고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다 봤거든. 우리 주 목사님 고생한 것도 내가 보고, 양정모(오정모)라 하는 그 사모도 봤어. 평양 시내의 경찰이 모든 믿는 목사들 다 데리고 와가지고 거기서 이제 신사참배를 시켰는데, 다 데리고 신사에 가가 절을 다 시켜. 내 눈으로 그거를 다 봤어. 목사님이 가고 난 뒤에 그 평양 시내가 그때는 옛날에는 평양이 참 믿는 도시가 되어가지고 주일날에도 가게 문을 안 열어. 다 믿는 사람이라 그래가지고. 목사님 집에 먹을 것이 없다고 쌀자루도 던져주고 가고 밥도 온갖 거 다 돈 뭉터기도 던져주고 가고 그랬어. 목사님이 몇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니까, 이제 사모님이 “죽으러 나와도 거기서 죽으러 나와야 되지. 그 시험을 이겨야 됩니다”하셨어. 그래가 있다가 목사님이 (1944년) 4월 21일 날 돌아가셨어. 그 평양 거기서, 옥중에서 돌아가셨어. 얼마나 고생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돌아가셔 가지고 그 돌박산이라 카는 산에 갖다가 장례를 했지. 지금도 목사님 산소가 그 돌박산에 있을 거야. 나중에 영화로 주기철 목사님에 관한 영화를 봤는데, 내가 본 것의 반도 안 했어. 말 할 수 없이 더 많이 고생했어. 이후에 청송의 박동기 목사님에게 갔어. 그 때는 신앙을 지키려면, 살려면 박 목사님께 가야 한다고 했어. 박 목사님은 촌에 있는 우리 집에 있을 때 우리 집에서 한번 오셔서 예배도 보고 그러셨어. 그때 박 목사님을 보고 그랬는데, 나중에 33인이 모두 잡혀 들어가서, 석 달 정도 있다가 나왔어. 그래가 밥을 해가 갖다 드리고, 해방이 되었어. 그래가지고 이제 8월 15일, 16일날 나왔잖아. 나왔다고 소 잡고 잔치하고 그랬어. 그때 만주패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시온 교인이면서 청도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만주로 전도하러 간다고 해서 만주패라 카면 있었는데, 소 한 마리 잡아가 잔치를 크게 했다.”
영국 셰필드 대학의 동아시아학 근대 한국학 명예교수셨던 James H. Grayson (김정현) 목사님은 2008년 8월 10일, 2010년 3월 28일, 2013년 6월 9일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경주 교회를 방문하셔서 남아 있는 2세대 교인들을 인터뷰하시고, 교회의 역사를 세계 학술지에 게재하셨으며, 때로는 주일 설교를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1982년 4월 25일 기념